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마 제국/역사 (문단 편집) ==== 최후의 대결, 악티움 해전 ==== 옥타비아누스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상대하는 동안 안토니우스는 야심차게 파르티아 원정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가 기대했던 만큼 병력을 보내주지 않았고 그 자신의 작전 실패도 겹치면서 파르티아 원정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는 연인이 된 클레오파트라 7세의 이집트의 도움으로 군사를 다시 보충하였고 이에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와 이혼한 후 로마로 돌려보내고 클레오파트라 7세와 결혼하였다. 비록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 7세의 힘으로 군대를 재건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로마인 배우자를 부정하고 동방의 정부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고 선동하면서 안토니우스의 로마 내 인기가 매우 추락하였다. BC 34년 안토니우스가 아르메니아를 정벌하고 자신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를 아르메니아 왕으로 삼았고 클레오파트라 7세에겐 ‘왕들의 여왕’이란 호칭을 부여하자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로마에 더이상 충성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였고 이 때문에 안토니우스의 인기는 더욱 떨어졌다. 결정적으로 안토니우스의 비밀 유언장을 보관 중이던 베스타 신전의 여사제에게 유언장을 공개하도록 강요하였는데 그 유언장에는 로마가 정복한 영토를 자신의 아들들에게 나누어 줘 왕이 되도록 하고 장래 자신과 클레오파트라 7세의 무덤은 알렉산드리아에 호화롭게 건설하라고 되어 있었다. 안토니우스가 로마를 버렸다고 생각한 로마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은 분노하였고 안토니우스의 BC 34년 집정관 지위도 박탈하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가 있는 이집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였다. BC 31년 초 아그리파의 함대가 로마군을 수송하여 아드리아 해를 성공적으로 횡단하였고 옥타비아누스는 곧 벌어질 큰 전투의 예비 단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 옥타비아누스의 명령을 받은 아그리파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의 본대를 그들의 해상 보급 경로에서 차단하고 옥타비아누스는 코르푸 섬 맞은편에 위치한 본토에 도착,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바다와 땅 모두에서 막히자 안토니우스군 내부에서 탈영병이 발생하여 계속 옥타비아누스에게 투항하였다.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해상 차단 해제를 기도하기 위해 그리스 서쪽 해안의 악티움만으로 나아갔다. 그곳에는 아그리파의 함대가 있었는데 안토니우스의 함대보다 수는 많지만 더 작고 조종하기 더 쉬운 배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BC 31년 9월 2일 악티움 해전이 발발하여 옥타비아누스군이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